정기구독 · 광고안내  
시사한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포토/영상 상조/장례 커뮤니티 연재
연재고염옥의 좌충우돌 산행기
30. 백화산과 신의터재
시사한국  |  webmaster@sisahankook.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4.10  09:52:0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백화산

백화산은 경북 상주시 모동면과 모서면, 충북 황간면 사이에 있으며, 최고봉은 한성봉, 포성봉과 동쪽에는 큰 계곡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에 금돌성이 둘러싸고 있다.
금돌성은 삼국시대에 축성한 포곡식 석상이다. 성 안쪽으로는 군사들의 활동을 위해 돌로 회곽도를 만들고 회곽도에서 약 1.5m높이로 성벽을 쌓았다. 한성봉의 한 변으로 내성을 동쪽으로 외성을 쌓았는데 총 길이는 7km가량 된다. 차단성을 약 600m 쌓기도 했다.


이 성은 660년 7월 김유신이 이끄는 백제 정벌군을 떠나보낸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총 지휘로 사용하면서 백제가 항복한 소식을 듣고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또 1254년 몽고 침략군을 맞은 상주 백성들이 한 달여 싸움 끝에 물리친 유서 깊은 성이다. 높고 험한 지세는 신라가 산국통일을 위해 백제 징벌의 근거지로 사용하였고 고려 때는 상주의 백성들이 몽고군을 격퇴하는 승첩지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는 상주 지역의 의병들의 은신터로 호국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산행으로 보현사를 지나 금돌성 암릉 구간을 통과한 코스다.
 

백화산 수봉재는 경북과 충북의 도계이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다.
영동지방은 신라 때 군 경계였다. 황희 선생의 옥동성원이 있으며 백옥정도 있다. 뒤 편으로 넘어 있는 반야사는 백화산 밑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수명 500년 된 배롱나무(목백일홍)보호수가 있다.
조선 제7대 세조 임금이 건강을 위해 회향법회를 열었고 목욕을 하고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의터재

집에서 출발할 때는 날씨가 괜찮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워낙 장거리라 돌아갈 수도 없고 운전연습만 하게 생겼다.
드라이브로 추풍령에서 가까운 백두대간 큰 재를 넘어가기로 했다. 68번 도로에서 큰 재를 넘어 공성에서 용문산 국수봉 근처를 맴돌고 싶었으나 비가 오니까 걸을 수가 없어서 용문산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다시 작점고개 넘어 추풍령 저수지 지나 황간면 지봉리, 모동, 모서를 지나 901번 도로에 들어가기 직전에 지봉리 마을 앞에 마을 자랑비를 읽고 지났다. 학무산 아래 자리한 마을은 살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고추, 포도, 사과, 젖소, 복합영농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로 주민이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단다.
지기재를 넘어 901번 도로 어산리에서 신의 터재 한쪽은 화령재 또 한쪽은 지기재로 간다. 지기재 쪽은 소요 한 시간 삼십 분이라 쓰여진 것을 보면 웬만하면 갈 수도 있겠지만 비가 온 뒤고 지금도 조금씩 내린다.


상주 김준신 의사 제단 비는 경국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에 있으며 임진왜란(1592년)년때 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싸우다가 상주 북천에서 중년에 순절한 김준신(1560~1592년) 의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철종 1년(1850년)에 건립된 것이다. 김준신 의사는 전국 최초의 솔령장이 되어 북천 전투에서 순직했다.
상주 낙화담의 소나무 수령은 550~600년이다. 이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고려 말 황간 형감 김구정(1392년)은 벼슬을 버리고 판곡에 은거했다. 이 낙화담은 김준신의 일꾼을 학살한 것에 항거하다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부녀자들은 외적에세 욕을 당하기도 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이 연못에 투신 했으니 후세 사람들이 낙화담이라 한다. 백화산의 풍수지리가 나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옥연사는 경북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있으며 문화재 자료 제179호이다.
조선 중기 문신은 노수신(1515~1590년)은 중종 38(1548년) 문과 초시를 비롯하여 모두 급제 1595년에는 영의정까지 오른 문간공이다. 효종 9년에 세웠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방치되어 있었다.
사산초등학교에는 효자 정재수의 추모비가 있다. 1974년 1월 22일 재수 군은 부친과 함께 닭 한 마리를 싸 들고 큰 집에 가던 중 눈이 하고 많이 와서 갈전리 고갯길을 넘어가다 눈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쓰러지자,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덮어드리고 꼭 껴안아 녹여 드렸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재수 군은 아버지를 껴안은 채 숨졌다고 한다.

 

< 저작권자 © 시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시사한국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8길 11 (여의도동 44-1번지 3층)  |  대표전화 : 02-6264-4114  |  팩스 : 02-6442-5113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아 00420  |  발행·편집인 : 김호승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보민
Copyright © 2006 시사한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2007@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