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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삿갓과 죽계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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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31  09: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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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방랑 시인 김삿갓 관광단지는 소백산 뒤편 줄기에 있었다.
김삿갓은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란 때 투항 한 죄로 집안이 멸족당하게 되자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강원 영월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방역죄는 가문을 3대까지 명족시키는 동례가 있었는데 그나마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이들 모자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단다. 이들 모자는 떳떳한 사대부로 지낼 수 있었으나 명색이 반역죄로 조부인 김익순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폐적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권문세족임을 숨기고 산속 깊은 속 영월에서 살았다. 모친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을 소상히 알지 못한 김병연은 학업에만 열중했다.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때 어머니로부터 집안 내력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을 시작하였다.
김병연은 죄의식 속에서 하늘은 바로 쳐다볼 수 없다 하여 삿갓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전라도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죽장에 삿갓 쓰고 잘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당시 국민들의 애창곡으로 영월의 노래임을 자랑했다. 관광단지 내에는 많은 시의 구절들이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공주네 펜션 이란 집에서 배추쌈과 청국장찌개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시설은 아무것도 없는 옛날 육십 년대 시골 방에서 잠을 잤다.
길을 나서면서 온달 관광지로 갔다. 삼국 시대에 고구려 영토로 고구려 평원왕 때 소백산맥 죽령과 남한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치열했던 영토 전쟁이 지금에 야전병원과 같은 부상병을 치료하던 곳이란다. 삼국시대의 국경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온달산성은 온달 장군이 쌓은 성이라는 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와의 전쟁 중 출병했던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온달산성 탈환의 전투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화산 등산로 입구를 지나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는 활고개를 지나 동강 강가에서 된장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고 야생화 거미바위솔을 얻어서 차에 싣고 내년 봄에 와서 분양받을 것을 약속하고 나왔다. 양지골 식당은 황토방 펜션도 있다.
동강 강가에는 아름다운 곳도 많이 있었다. 줄을 이용해 건너는 배도 있었다. 사진을 찍다 발을 헛디뎌 손바닥과 무릎에 상처가 났다. 영월 시내 약국에 가서 임시 처치를 하고, 차 속에 한참 동안 쉬었다.

죽계구곡


죽계구곡 계곡은 소백산 국망봉에 발원하며 소수서원을 감싸 안고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데 금왕 반석 위에 옥이 구르는 듯 솟구치는 물방울이 마치 수정 구슬을 흐트려 놓은 듯 아홉 구비 절경을 이루어 죽계구곡이라 한다.
죽계구곡은 고려 후기에 대문장가인 근재 안축이 읊은 ‘죽계별곡’의 배경이기도 하고 조선 중기에는 신재 주세봉, 퇴계 이황도 이곳에서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마을 길옆에는 사과밭이 줄을 이어 있었다. 바로 소수서원으로 들어갔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고 한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 임금께 건의하여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 때 창건된 속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적송 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를 만난다.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도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공간도 있었다. 강학 공간을 거쳐 배출된 인사가 4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주자학을 소개하여 성리학에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단다.


조선 말 박씨 댁 규수가 민씨 가문으로 출가했는데 남편이 병을 일찍 죽어 홀로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데 이웃 천석꾼이 연정을 품고 모함과 뜬소문을 퍼뜨려 참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결백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하인이 마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자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임금에게 알려 회복하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가상한 뜻을 기리고자 순조 22년에 열부 정려를 내려 열부각과 충복각을 세우게 되었다.


길과 바로 앞에 금성대군에 신단도 있었다. 이곳은 조선 세조 2년 1456년에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순흥에 위안한치 되었다. 그때 순흥의 부사 이보흠도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게 되었다.
주실령을 넘어 인심 좋고 정이 넘치는 누구든지 맑은 공기에 취해 쉬어 가라는 서벽마을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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